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외쳐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알고 내가 어디서 온 것도 알거니와 내가 스스로 온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이는 참되시니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나(요한복음 7:28)
★요한복음 7:28-31의 어떤 포인트 ★
오늘 성경 말씀 앞부분에는 예수님이 구세주라는 것을 의심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(6장42절에도). 그들은 예수님의 <출신>에 대해서 <알고>있었고 그러기에 <자기들이 그 출신을 아는 이가 메시아일 수가 없다. 메시아가 어디서 오는 지를 사람이 알 수 없기 때문에>라고 생각을 했습니다. 사람들이 눈에 보이는 <출신>에 주목한 것에 대해 예수님은 자신의 기원을 <나를 보내신 이>라 하시며 이 세상에 오시게 된 <근원>을 보라고 하십니다. 이 시선의 단절이야 말로 예수님이 십자가위에서 죽게 되시는 근본 원인이 되었다고 할 수가 있겠지요. 그런데 오늘날 구세주를 기다리는 우리는 어떤 <구원>을 기다리고 있는지요? 그것은 <근원> 에서 오는 것인지요? 혹은 그냥 사람 생각으로 바라는 것인지요? 우리들은 과연 무엇을 오늘날 <희망>이란 말 속에 담을 것인가요? 함께 생각해 보십시다.
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(마태복음 9:36)
★마태복음 9:35-38의 오떤 포인트★
<수확>에 대한 상식하고 다른 예수님의 생각이 세겨진 아주 친숙한 성경 구절입니다. 35절에는 말씀의 전파가 표면적인 혹은 주관적인 <전달>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누군가에 <치유>를 가져오는 <행위>이기도 했다는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. 그러나 그것은 초월적으로 위에서 안겨지는 형태로 우리에게 온 것이 아니다는 것이 포인트가 될 것입니다. 무엇보다도 <불쌍히 여기셨다>란 말씀에는 무리가 가지고 있었던 <아픔>을 자신의 아픔으로 온 몸으로 받아드리시는 <공감=compassion>이라는 의미가 있다고 합니다. <목자 없는 양>과 같은 무리들에 대한 <공감>을 가지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<수확>이란 과연 무엇을 가리키는 말씀인가요? 또 이 말씀은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라는데 감사절을 맞이한 오늘 이 성경 말씀을 듣는 우리는 제자들 입장에 있는 것일까요? 혹은 예수님께서 공감하신 <무리>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요?
그 아이가 자라매 바로의 딸에게로 데려가니 그의 아들이 되니라 그가 그 이름을 모세라 하여 가로되 이는 내가 그를 물에서 건져 내었음이라 하였더라 (출애굽기 2:10)
★출애굽기 2:1-10의 오떤 포인트★
애굽 왕 바로가 히브리 남자 아기가 나거든 하수에 던져라는 명령을 내림으로 나일 하숫가에 버림당한 모세를 바로의 딸이 발견하여 키우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. 클 때까지 유모가 된 엄마가 어떻게 키웠는지 또 바로 와의 딸이 장성한 후에 어떻게 키웠는지 성경은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습니다.아시다 싶히 모세는 출애굽을 이끈 지도자였습니다. 그러나 그가 지도자의 길을 걸어가게 되기 전의 인생은 희망과 전혀 반대인 인생이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. 나느네 같이 목적없는 유방의 길을 걸어가면서 이옄땅에서 자기 가족을 만들게 되고 자기아들에게 게르솜(거기서 기류민=나그네)란 이름을 안기게 되는 마음속 퐁경이란 어떤 것이였을까요? 자기정체성(identity)는 근본적으로 아로세겨진 단절의 흔적이나 결코 감추어지지 않은 상처와 무관하지 않다고 합니다. 자기 마음속에 세겨진 단절과 상처를 가지면서 왜 모세는 출애굽의 지도자가 되었덤 것인가. 이 이야기가 우리 한사람 한사람의 자기정체성(identity) 와 무관한 것인가. 함께 생각해 보십시다.
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갔고 룻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그 나이 칠십오 세였더라(창세기 12:4)
★창세기 12:1-4의 어떤 포인트★
아브람이 부르심을 받는 장면입니다. <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>. 1절부터 4절까지의 짧은 구절안에 <복>이란 단어가 5번 나오는데 아시다 싶이 11절까지의 성경 내용은 창조시 <축복>을 받은 존재인데도 불구하고 죄로 말미암아 <저주>받을 수 밖에 없는 인간의 모습들이 그려져 있고 <저주>란 단어가 5번 나옵니다. 오늘 성경 말씀은 그러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하심이 시작한 순간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. <복>은 성경 전체를 중심 제목의 하나입니다. 그런데 <복>이란 <심히 번성>하고 <영원한 기업>으로 땅을 얻게 돤다는 약속으로 표현되는데(17장), <.복>은 이렇게 눈에 보이는 약속만을 가리키는 것일까요? 또 왜 아브람이 <복>을 받게되었던가요? 예수님이 밝혀주신 <복>과 더불어 생각해 보십시다.
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(창세기 1:1-2)
★창세기 1:1-5의 어떤 포인트★
우리들은 <미래를 창조한다>등 여러장면에서 인간이 주어가 되면서 <창조>라는 말을 씁니다. 그러나 구약성경에 있어서의 <창조>의 주어는 하나님밖에 없습니다. <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위에>있는 그 수면을 <하나님이 영=숨>이 운행하셨다. 창조의 첫 장면입니다마는 바빌론 포로의 가장 깊은 암흑의 시기에 하나님의 영=숨이 임하셔서 창세기의 이 장면이 편집되었다고 합니다. 어두운 암흑속에 하나님의 영=숨이 역사하심이 성경말씀에 아로 세겨져 있습니다. 4절에 <빛과 어둠을 나누셨다> 했는데 중요한 것은 <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었다>한 이 저녁과 아침의 순서가 아닐까 싶습니다. 피조물을 <보시기에 좋다>하신 하나님이 인간에게는 <(축)복>을 주셨다는 의미와 더불어 생각해 보십시다.
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(사도행전 8:4-5)
★ 사도행전 8:4-8의 어떤 포인트★
예루살렘에서 일어난 큰 핍박으로부터 피할려고
예루살렘을 떠나고 <흩어진> 사람들이 오늘 성경말씀의 주인공입니다. 핍박을 피하고 예루살렘을 떠난 사람들 중에는 빌립처럼 사마리아로 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. 그들은 <도망>간다는 어떤 <빚>을 지고 있다는 감각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. 그러면서도 자기가 걸어가는 인생 길 도중에서 <복음의 말씀을 전했다>했습니다. 그런데 사마리아란 유대인들이 <더럽다>는 이유로 관계맺기를 거절하는 지역이였습니다. <도망>을 가면서 또 <빚>을 지고있다는 죄책감을 느끼면서 그/그녀들이 유대인이라는 두꺼운 껍질을 깨나가는 가운데 사마리아에서 전도를 시작한 것은 사울(바울)이 박해에 가담하고 있었던 바로 그 시기였습니다. 바울이나 베드로가 그리스도를 널리 복음을 전하기 전에 사도도 아닌 사람들이 복음을 이미 변두리에서 <전도>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가지는 의미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십시다.
그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그들도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(로마서 4:11)
★로마서 4:1-12의 어떤 포인트★
사도바울의 사상의 핵심이 나타난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. 어떤 <행위>에 대해 대가가 지불된다는 것은 우리 사회나 경제학의 <상식>이라고 할 수가 있지요. 그러나 바울은 이 <대가>라는 생각에 스며든 상식에 함정이 있다고 지적합니다. 그것은 <행위>없는 자의 희망이라고도 말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. 우리들은 많은 경우 일을 달성할 수 있었을 때 기쁨을 느낍니다. 그 소박한 기쁨은 나쁜 것이 아니겠지요. 그러나 그러한 상식이 저도 모르게 덮어버리는 차원이 없을까? 사도바울의 그러한 물음이 오늘 성경말씀안에 메아리치고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. 자랑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 처지에 <의>라는 표를 받는다는 것. 사도바울이 가르치는 아브라함의 할례가 가지는 뜻과 우리들의 삶속에 하나님이 <인>치신 흔적을 겹치면서 생각해 보십시다.
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아니하셨느냐 (야고보서 2:5)
★야고보서 2:1-9의 어떤 포인트★
오늘 성경 말씀은 <빈부 격차>에 대한 편견과 차별로 부터 벗어날 것을 강력히 권하고 있습니다. 사도 바울도 지적했듯이 이러한 차별은 고대교회에 있어서 그냥 두고 볼 수 없는 심각한 문제였나 봅니다. 성경은 그러한 <차별>은 <하나님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>심과 어긋나는 것이라고 지적합니다. 그런데 이런 어긋남은 어떻게 일어나는가요? 성경은 이 어긋남으로 인하여 인간이 <부요함>을 오해하는 것이 바로 <아름다운 이름을 비방>하는 일이라 했습니다. 성경이 가르치는 <비방>을 하지않기 위한 <최고의 법=왕에서 나온 법>에 대해서 예수님은 어떻게 가르치고 계시는지, 또한 우리는 과연 <부요함>을 입고 있는지, 혹은 <가난함>을 입고 있는지 생각해 보십시다.
그러나 지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있으면 경건이 큰 이익이 되느니라(디모데전서 6:6)
★디모데전서 6:3-12의 어떤 포인트★
편지에는 목적이 있을 것입니다. 성경학자에 의하면 이 편지는 사도바울이 사망한 후에 사도바울의 편지라는 형식을 써서 씌여진 것이라고 합니다. 편지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권명이란 내용을 가지고 있습니다. <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> 사람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있는 것으로 이미 그리스도인으로서 옳바르지 않은 태도들이 있었음을 알수가 있고 또 <돈을 사랑함>이란 표현으로부터 <경건>함과 돈을 연결시켜버리는 생각들이 존재함을 알 수도 있습니다. 그런데 일부러 <지족하는 마음이 있으면> <경건이 큰 이익이다>고 하는 것은 어떤 뜻일까요? <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>를 좇으며 <영생을 취하라>는 권함의 현대적의의와 더불어 생각해 보십시다.
★골로새서 3:12-17의 어떤 포인트★
<옷입다>는 말씀에 우선 주목하십시다. <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>을 <옷입다>란 어떤 뜻일까요? 이 가치들은 우리가 옷을 입듯이 자기 몸의 <외부>에 있는 것이라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는 것 같습니다. 이러한 가치, 즉 <사랑>이 자기 <내부>에 없을 때 우리는 누군가를 비난하거나 용서 못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. 성경은 <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>고 가르칩니다. 그리고 <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>게 하며 <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>라고 합니다. 성경이 말하는 <평강>이 무엇이며 또 <사랑>,<평강>과 <말씀>,<노래>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지 함께 생각해 보십시다.